누군가는 논을 일구고, 나는 마음을 일군다

🌾 가족 안에서 느끼는 죄책감, 그리고 나를 지키는 일


따뜻한 햇살 아래 창가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 중년 여성의 고요한 모습

며칠 전, 바로 아래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동생은 늘 자기 삶을 성실히 살아왔습니다.
부지런하고 추진력 있는 사람이라 언제나 자신이 정한 방향으로 묵묵히 걸어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게 직설적으로 들리는 말도, 사실은 그만의 방식으로 진심을 전하는 거라는 걸 압니다.
그런 동생이 있기에, 나도 내 자리에서 더 단단해지려 합니다.

통화 중에 동생이 물었습니다.
“언니, 바빠?”
아마 친정엄마가 나에 대해 “요즘 바쁘다”고 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 말투가, 뭐가 그리 바쁘냐는 뉘앙스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마스 시즌 대비 간세 인형 100개를 만들 거야”라고 말했어요.
그제야 동생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형 포장과 마케팅 이야기를 잠시 나눴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말했습니다.
“난 토요일에 친정에 가서 일했는 너무 힘들더라.
그리고 일요일엔 마라톤 대회 나가서 몸살 날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면서, 내 마음 한 켠이 묘하게 흔들렸습니다.
나는 “이모가 와 계신데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는데,
동생은 “바쁘다며 뭐 하러 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그래도 가야지’라는 반어처럼 들렸습니다.


사실 나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운 적이 거의 없습니다.
멀리 살아서, 손이 닿지 않았던 시간들이 더 많았죠.
대신 근처에 사는 동생 셋이 늘 부모님 곁을 지켰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가을 들판 가장자리에서 잠시 멈춰 서서 생각을 정리하는 여성의 뒷모습


나는 늘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나는 도움이 안 되는 딸이구나.’
‘나는 가족의 울타리 밖 사람 같아.’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겨도
나에게는 연락이 잘 오지 않았어요.
혼자 살기 전엔 더 심했죠.
이제 와서는,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바쁘냐”는 말로 엄마는 안부를 물어오시네요.

그런데 나는 정말 바쁩니다.
누구보다 바쁘게, 나를 다시 세우는 일로.
좋아하는 책 읽기를 여유롭게 하지 못할 정도로요.


나는 이제 인형을 만들고, 글을 쓰고, 블로그를 운영합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의미 없는 일’로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에게 이 일들은
‘존재를 회복하는 노동’이에요.
남들은 밖으로 나가 몸을 움직이지만,
나는 내면을 회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건 훨씬 조용하지만, 깊은 일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려 합니다.
내가 부모님 곁에 있지 않았던 건 ‘죄’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었어요.
나는 손이 아닌 마음으로 돌보는 역할을 해왔던 거예요.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어쩌면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요.


이제는 ‘못 도운 딸’이 아니라
‘자신의 길 위에서 회복 중인 딸’로 나를 부르기로 합니다.
누군가는 논을 일구고,
누군가는 마음을 일굽니다.
나는 후자일 뿐이에요.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용한 방에서 바느질을 하며 미소 짓는 여성, 테이블 위 작은 인형과 실타래


“나를 지키는 일은, 가족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선택한 또 다른 방식의 사랑이다.”

세니카 🌿
「다시, 나로 걷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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